[사성인Story] 통장 없는 사람들의 협동조합 "빈곤해도 행복할 권리, 금융은 거들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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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문턱은 높습니다. 신용등급이 낮거나, 주소지가 불분명하거나, 기초생활수급자라는 이유로 수많은 이들이 금융 시스템 밖으로 밀려납니다. 하지만 강원도 원주에는 “당신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며, 벼랑 끝에 선 이에게 손을 건네는 곳이 있습니다. 담보도, 보증인도, 복잡한 서류도 없습니다. 오직 ‘관계’와 ‘신뢰’만으로 작동하는 독특한 금융기관. 이곳의 이름

은행 문턱은 높습니다.

신용등급이 낮거나, 주소지가 불분명하거나,

기초생활수급자라는 이유로 수많은 이들이 금융 시스템 밖으로 밀려납니다.

하지만 강원도 원주에는 “당신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며, 벼랑 끝에 선 이에게 손을 건네는 곳이 있습니다.

담보도, 보증인도, 복잡한 서류도 없습니다. 오직 ‘관계’와 ‘신뢰’만으로 작동하는 독특한 금융기관.

이곳의 이름은 ‘갈거리(葛去里)’. 칡 덩굴처럼 서로 얽히고설켜 돕고 살자는 뜻을 품은 옛 지명입니다.

지난 20년간 노숙인, 쪽방촌 주민, 신용불량자들의 든든한 금고가 되어주며, 일반 협동조합 평균의 14배에 달하는 출자금을 모아온 곳!

갈거리사회적협동조합의 치열하고도 따뜻한 금융 이야기를 전합니다.


“오래전, 한 노숙인 조합원분이 찾아오셨습니다. 

연락이 끊겼던 형제들과 닿아 제주도 여행을 가게 됐다는 겁니다. 

형제들은 동생 형편을 아니까 ‘돈 걱정 말고 몸만 오라’고 했겠죠. 

하지만 그분은 그러고 싶지 않으셨던 겁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 앞에서 나도 내 몫의 회비를 내고, 

밥 한 끼라도 사고 싶은 마음. 가장으로서의 자존심이 있었던 거죠.

당장 수중에 돈은 없고, 1금융권 대출은 꿈도 못 꿀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조합 문을 두드려 긴급 소액대출로 50만 원을 빌려 가셨습니다. 

그분은 그 돈으로 당당하게 형제들과 어울리셨고 돌아오셔서 차곡차곡 갚아 

결국 전액을 상환하셨습니다. 우리가 빌려드린 건 50만 원이라는 돈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포기할 수 없었던 마지막 ‘자존감’이었을 겁니다.”


원주의 슈바이처, 가난한 이들의 통장을 관리하다

갈거리사회적협동조합의 역사는 1991년, 원주 지역의 ‘슈바이처’라 불리던 곽병은 원장(현 자문위원) 부부의 헌신에서 시작됩니다.

당시 노숙인 쉼터와 무료급식소 ‘십시일반’을 운영하던 곽 원장은 안타까운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노숙인들이 낮에 힘들게 일해 일당을 받아와도, 그 돈을 관리할 줄 몰라 술값으로 탕진하거나 잃어버려 싸움이 잦았던 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보다 관리하는 게 더 중요하구나.”

곽 원장은 그들의 돈을 대신 맡아주는 ‘통장 관리’를 시작했고, 이것이 체계화되어 2004년 9월, 국내 최초의 노숙인 신용협동조합인 '갈거리협동조합'이 탄생했습니다.

흥미로운 건 설립자의 철학입니다.

부부 의사였던 곽 원장은 “만 60세가 되면 병원 문을 닫고 온전히 봉사하며 살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은퇴 시점이 되자 정확히 만 60세 생일 달에 병원 간판을 내리고, 자신이 일군 사회복지시설 ‘갈거리사랑촌’을 모두 천주교 원주교구에 기부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교구 측에서 “금융 업무인 협동조합은 운영하기 어렵다”며 받지 못한 것입니다. 2016년, 조직이 공중분해될 위기였습니다. 그때 조합원들과 지역 사회가 나섰습니다. “이 소중한 자산을 없앨 수 없다”며 십시일반 힘을 모아 독립 법인인 ‘사회적협동조합’으로 재창립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서류 한 장 없이 92.8%가 갚는 비결

이곳의 운영 방식은 기존 금융 문법으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신용등급 조회도, 담보 설정도, 복잡한 서류 심사도 없습니다. 오직 '조합원 활동'만이 신용을 증명합니다. 3개월 이상 가입하고, 10회 이상 저축하며, 금융 교육을 이수하면 대출 자격이 주어집니다. 박성용 대표는 이 시스템의 핵심을 '신뢰'라고 말합니다.

“은행은 서류를 보지만, 우리는 사람을 봅니다. 사인 하나만 받고 돈을 내어드리죠. 그 믿음이 고마워서라도 갚으십니다.” 결과는 놀랍습니다. 제도권 금융이 ‘위험군’으로 분류해 외면한 이들에게 무담보로 대출을 해주는데도, 최근 3년간 정상 채권 비율은 92.8%에 달합니다. 정부 지원금이 아니라, 나와 처지가 비슷한 이웃들이 폐지를 줍고 일용직을 뛰며 모은 ‘피 같은 돈’이라는 걸 알기에, 절대 떼어먹을 수 없는 ‘무거운 돈’인 것입니다.

빚 1,100만 원, 아이 넷 엄마의 홀로서기

갈거리사회적협동조합의 목표는 금융 지원사업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돈 때문에 무너진 ‘삶을 복원’하는 것입니다. 김선기 사무국장은 최근 자립에 성공한 40대 한 여성 조합원의 사례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분은 이혼 후 홀로 아이 넷을 키우는 가장이었습니다. 전 남편의 지속적인 학대에 시달렸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100만 원이 넘는 빚까지 떠안고 있었죠. 자활센터에서 일하며 월 130만 원을 벌었지만, 빚 독촉과 생활고 때문에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갈거리는 그녀에게 ‘통합 솔루션’을 제공했습니다. 먼저 조합이 운영하는 ‘돌봄 안심 주택’을 통해 안전한 주거지를 마련해주었고, 채무 조정 상담을 통해 빚을 10분의 1 수준으로 줄여주었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금융 교육’에서 왔습니다. 빚이 정리되자 저축할 여력이 생긴 것입니다. 그녀는 갈거리의 재무 관리를 받으며 1년여 만에 400~500만 원의 목돈을 모았고,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사회복지사 자격증까지 취득해 당당히 사회로 나갔습니다. “금융 배제 계층에게 돈만 빌려주는 건 미봉책입니다. 빚을 해결해주고, 관리하는 법을 알려주고, 주거까지 뒷받침되어야 비로소 한 사람의 인생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금융 교육, 취약계층만의 문제가 아니다

갈거리는 최근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금융 교육의 대상을 ‘일반 시민’과 ‘소상공인’으로 확장하는 것입니다. 김선기 사무국장은 12주간 일반 시민 대상 강의를 진행하며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월급을 400~500만 원씩 받는 직장인들도 재무적으로는 무너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돈을 버는 법만 알지, 관리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죠. 특히 소상공인들은 사업 소득과 개인 소득이 섞여 있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돈이 모이지 않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갈거리는 내년부터 소상공인을 위한 특화된 재무 관리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입니다. 금융 소외 계층을 돌보며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이제는 지역 사회 전체의 금융 건강을 챙기는 ‘금융 주치의’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가장 가난한 이들이 만든 가장 큰 자본

갈거리사회적협동조합에 모인 출자금은 약 4억 2,900만 원. 이는 대한민국 일반 협동조합 평균 출자금의 약 14배에 달하는 규모입니다.

박성용 대표는 이 숫자의 무게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많은 돈을 모았습니다. 이건 단순한 자본금이 아니라 그들의 ‘절실함’입니다. 수익 모델이 없는 사회적 금융이 20년 넘게 버틸 수 있었던 힘도 바로 이 절실함과 상호부조의 정신 덕분입니다.” 갈거리는 이제 원주를 넘어 ‘금융 복지’의 모델을 전국으로 확산하려 합니다. 사회복지사가 금융을 모르면 반쪽짜리 복지가 될 수밖에 없기에, 복지 현장에 ‘금융 돌봄’을 이식하는 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빈곤해도 행복할 권리, 금융은 거들 뿐입니다."

돈은 도구일 뿐인데, 지금 세상은 돈이 목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청소년 때부터 올바른 금융 교육이 필요해요. 

부자가 되는 법이 아니라, 돈을 내 삶의 도구로 주체적으로 다루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돈에 끌려다니지 않는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갈거리사회적협동조합 김선기 사무국장 -


▶ ‘갈거리사회적협동조합'의 임팩트는 사회성과인센티브 매거진 <사성인> 5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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