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ITAGE] 우리 착한 척이라도 하면서 살면 안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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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착한 척 경멸하는 사회 현대사회를 두고 저마다 다양한 진단을 내리지만, 나는 오랫동안 우리 사회가 ‘착한 척을 경멸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고 느껴왔다. 대놓고 악한 사람보다 위선자를 더 싫어할 정도로.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내며 ‘개념연예인’이라 불리던 한 연예인은 사생활 논란에 휘말리자 더 거센 비난을 받았다. 어디 연예인뿐인가. 입바른

Intro: 착한 척 경멸하는 사회 

현대사회를 두고 저마다 다양한 진단을 내리지만, 나는 오랫동안 우리 사회가 ‘착한 척을 경멸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고 느껴왔다. 대놓고 악한 사람보다 위선자를 더 싫어할 정도로.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내며 ‘개념연예인’이라 불리던 한 연예인은 사생활 논란에 휘말리자 더 거센 비난을 받았다. 어디 연예인뿐인가. 입바른 말을 해오던 정치인이 논란의 중심에 섰을 때도 늘 같은 비판이 따라붙었다. “위선자!”

우리는 왜 이토록 위선자를 싫어할까?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사람들은 위선자가 단순히 선(善)을 실천하지 못했다는 사실보다 도덕적 발언을 통해 스스로를 더 선한 사람으로 포장했다는 점에 더 크게 분노한다1. 다시 말해, 감히 ‘착한 척을 했다’는 것. 감히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인 양 행동했다’는 것에 대한 괘씸함이 더 크게 작동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감정이 위선자 개인에 대한 분노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데 있다. 위선자에 대한 분노는 어느새 선(善) 자체에 대한 냉소로 번진다. 누군가 정의를 말하면, “그래서 너는 얼마나 깨끗한데?” 누군가 평등을 말하면, “그래 너 잘났다.” 누군가 소수자의 권리를 말하면, “또 시작이네. 선민의식. 도덕적 우월감. 어우 피곤해.”라는 반응이 돌아온다. 그렇게 우리는 위선자를 극도로 경멸하다가, 어느 순간 착하려는 시도 자체를 비웃게 된다. 

얼마 전 “우아한 위선의 시대는 가고, 정직한 야만의 시대가 도래했다2”는 국제정치 한줄평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샀다. 세계질서의 변화를 두고 한 말이지만, 위선의 종말은 어쩌면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시대정신이기도 하다. 착한 척하는 위선자보다는 차라리 대놓고 나쁜 사람이 낫다는 그런 감각. 우리는 지금, 그런 감각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착한 놈, 나쁜 놈, 그리고 ______

사람들이 선보다 악을 좋아해서일까? 그렇지는 않다. 명확히 해두건대, 사람들이 위선자에게서 견디지 못하는 것은 선(善) 이 아니라 위(僞), 즉 거짓과 위장의 뉘앙스다. 그다지 착하지도 않으면서 착한 척하는 것이 못마땅한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은 간단하다. 정말로 착하면 된다. 평생 자신보다 남을 위해 살아온 사람에게 누가 돌을 던지랴. 그런 사람들은 종교와 정치색을 떠나 대체로 존경받는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세상에는 분명 아주 착한 사람도 있고, 아주 악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둘 사이 어딘가에 머문다. 선한 마음도 있지만 이기적인 마음도 있고, 옳은 일을 실천하는 날도 있지만, 외면하는 날도 있다. 결국 위선의 문제는 많은 사람이 완전히 선하지도, 완전히 악하지도 않은 그 애매한 지점에서 발생한다. 완전히 선하지도, 완전히 악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상과 현실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 사이에 있는 애매한 사람들, 우리는 종종 그런 사람들을 ‘소시민’이라고 부른다. 사전은 소시민적 태도를 “사회적 문제나 거대 담론보다는 개인의 경제적 안정, 일상의 평온, 자기 보존을 최우선으로 삼는 이기적이고 속물적인 태도”라고 설명한다.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지만, 이 정의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소시민은 전쟁에 마음 아파하면서도, 치솟는 기름값과 비행기 값을 걱정하는 사람들이다.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결국 오늘의 생계와 내 가족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 소시민적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SV Hub 칼럼니스트 필자소개에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하고 싶은 사회학도”라고 거창하게 적혀 있지만 실은 나 역시 영락없는 소시민이다. 거대한 불평등을 공부하고 있지만, 현재 나의 가장 큰 걱정은 다음 달부터 오르는 월세다. 되도록 착한 기업의 제품을 사고 싶지만, 가격표를 보고 못 본 척할 때가 많다. 미국 유학 생활을 하며 거리로 뛰쳐나가고 싶은 순간도 많았지만, 결국 나는 유학생 비자와 나의 안위를 먼저 걱정했다. 사회학을 공부할수록 나는 나의 소시민성을 직면하는 순간이 많았다. 이 어쩌라고 싶은 TMI를 늘어놓는 이유는 당연히 자랑이어서는 아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우리 착한 척이라도 하며 살면 안될까요?

나는 소시민이지만, 동시에 내 연구가, 그리고 나 자신이 사회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아, 얘도 착한 척 하네”라고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내가 아주 특별히 착하거나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정도와 방식이 다를뿐, 타인과 사회에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조금씩은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목숨을 바쳐 사회운동을 하고 거리에 나갈 수도 있겠지만, 그런 배짱과 숭고함은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내게도 없다. 누군가는 기술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싶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가격이 비슷하다면 더 착한 기업의 물건을 선택하는 행동으로 또 누군가는 곤경에 빠진 시민을 돕는 방식으로, 또 누군가는 그 훈훈한 뉴스에 좋아요를 누르는 방식으로 마음을 표현하기도 한다. 다시, 착한 것에 대한 선호와 착하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조금씩은 있다고 생각한다.

위선자들에 대한 분노와 입만 산 이들에 대한 경멸을 이해한다. 나 역시 가끔 내가 고작 키보드를 두드리며 사회에 공헌한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닌가 자괴감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키보드라도 두드리는 것이, 입을 꾹 닫고 있는 것보다는 낫다고 나는 믿고 있다. 더 나은 사회란 특별히 용감하고 선한 사람 몇 명의 희생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물론 뜨거운 열정을 가진 누군가가 불을 지필 수는 있겠지만, 결국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소시민들의 미지근하지만 꾸준한 선의다. 그러니 당신들은, 우리들은 중요하다. 집단적 ‘착한 척’은 결국 더 착한 사회를 만든다. 그것이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위선자는 물론이고, 착한 척하는 사람까지 경멸하는 사회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칼럼의 제목과 같다. “우리, 착한 척이라도 하며 살면 안될까요?” 악법도 법이며 위선도 선이라는 말장난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결과만 선이면 선이라고 보는 공리주의적 주장도 아니다. 내가 옹호하는 것은 위선 그 자체가 아니라, 완벽하게 착하지 않을지라도, 그래서 때로는 위선으로 보일 위험이 있을지라도, 그럼에도 선한 방향으로 자신을 밀어붙이려는 소시민들의 노력이다. 착한 척이라도 하며 살자는 제안은 그런 노력을 너무 쉽게 조롱하거나 꺾지 말자는 이야기다.

‘착한 척이 가능해지는 사회’로

그러나 착한 척이라도 하며 살자는 말이, 모든 것을 개인의 선의에 맡기자는 뜻은 아니다. 개인의 선량함이라는 것이 상황에 따라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각종 서바이벌 예능의 유행 속에서 우리는 나이스해 보이던 사람도 막다른 궁지에 몰리자 그렇지 못한 선택을 하는 장면을 자주 목격했다. 그리고 그런 장면들은 우리의 의심과 냉소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착해 보이는 사람도 결국 착한 척을 하고 있을 뿐이고, 막다른 상황에 몰리면 누구나 자기 잇속을 챙길 것이라는 그런 냉소.

하지만 이야기가 꼭 그 방향으로만 흘러가야 할까?인간이 원래 이기적인 존재인지, 아니면 상황이 인간을 이기적으로 만드는 것인지에 관한 논쟁은 잠시 제쳐두자. 뭐가 됐건 분명한 것은, 사람은 괜찮은 사람의 자리에서 생각보다 쉽게, 그리고 자주 미끄러진다는 것이다. 그간 우리는 그 미끄러짐을 비웃거나 미끄러지기 전의 선의마저 의심하는 방식으로 반응해왔다. 그러나 우리가 충분히 해오지 못한, 그래서 더 중요하게 시작해야 할 이야기는 따로 있다. 그렇게 쉽게 미끄러질 수 있는 인간이, 그럼에도 괜찮은 사람으로 남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정치사회 서바이벌 예능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를 기획한 권성민 PD 역시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선을 집어던지는 일이 아니라, 위선을 끌어안고 지켜나갈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3 착한 사람은 마음 놓고 선의를 실천할 수 있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주변의 눈치를 보며 최소한 착한 척이라도 하게 만드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시스템이라는 것은 다양한 형태로 상상될 수 있겠지만, 우선 사회제도와 정책, 조직문화와 같은 거시적 변화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개인들의 집단적 착한 척이 착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는 있지만, 사실 사회란 개인의 총합 그 이상이다. 개인 한 명 한 명의 마음가짐이나 노력을 넘어, 사회 전체의 구조와 제도, 규칙과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뜻이다. 

착한 남편이라면 알아서 육아 휴직을 쓰겠지, 착한 시민이라면 장애인의 권리 요구를 이해하겠지, 착한 사장이라면 노동자를 함부로 대하지 않겠지, 하는 식으로 개인의 선량함에 기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컨대 장애인의 이동권이 애초에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었다면, 그 권리를 요구하는 일이 매번 출근길 시민들의 관용에 맡겨질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노동자의 권리와 근무환경이 제대로 보장되어 있었다면, 지하철이 몇 분 늦어지는 일이 누군가에게 하루의 생계를 위협하는 문제처럼 느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육아휴직 역시 어느 특별히 상냥한 남성의 결단이나 사장과 팀원의 배려에 기댈 것이 아니라, 조직의 당연한 절차가 되어야 한다.

착한 선택이 손해가 되지 않게 만드는 정책도 필요하다. 친환경 제품을 고르는 일이 늘 더 비싼 선택이 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일이 불편 감수를 뜻하고, 돌봄을 나누는 일이 커리어의 손해로 돌아와서는 안 된다. 선한 선택을 할수록 손해를 보는 사회에서는 선의도 오래 지속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복지와 사회안전망 역시 중요하다. 삶이 각박할수록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을 돌아볼 여유를 잃는다. 주거가 불안하고, 의료비가 두렵고, 일자리가 위태롭고, 노동시간이 끝없이 길어질 때 착한 마음은 생존 앞에서 쉽게 밀려난다. 착한 사회는 개인들의 따뜻한 마음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덜 불안하고, 덜 쫓기며 살아갈 수 있는 조건 위에서 훨씬 더 쉽게 만들어진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개인들에게 더 착하라고 요구하는 일이 아니라, 착한 행동이 조금 더 쉬워지는 바로 그 조건을 만드는 일이다. 애초에 덜 각박한 시스템 위에 개인들을 세워둘 필요가 있다. 착함을 개인의 숭고한 성품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기본값으로 만드는 일. 착한 척을 경멸하는 사회가 아니라, 착한 척이라도 가능해지는 사회로 나아가게 하는 일. 그런 것이 사회과학자들의, 그리고 정책입안자들의 역할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Outro: 불완전한 선함을 위하여

몇 해 전 사회적가치연구원에서 <Z세대 사회참여동인 분석 연구> 를 진행한 뒤, 『사회적가치에서 착함 걷어내기』 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적이 있다. 환경운동을 하는 청년들을 두고 "착하다”고 말하지 말자는 취지의 글이었다. 이번 칼럼의 제목과 다소 모순되어 보일 수 있겠으나, 사실은 정확히 같은 문제의식에서 나온 이야기다. 그때 내가 진짜 걷어내고 싶었던 것은 착함 자체라기보다는, 착함을 일부 특별한 사람들의 숭고한 자질로만 여기는 시선이었다. 착한 사람은 따로 있고, 우리는 아니라는 생각 말이다. 

마찬가지로 이번 칼럼에서 내가 옹호하고 싶었던 것은 위선 그 자체라기보다는, 완벽하게 착하지 않은 평범한 개인들에게서 나오는, 그래서 때로는 위선으로 보일 위험이 있는 불완전한 선함이었다. 많은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 글은 위선자에게 속 편한 면죄부를 주는 글이라기보다는, 입만 산 사람이 될 게 무서워 입 열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을 북돋는 글이었으면 한다.

착한 척을 경멸하는 사회는 가짜 선을 솎아낸다기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이 착하려는 시도 자체를 포기하게 만들고, 결국 선의의 싹마저 잘라 버린다. 따라서 우리가 위선만큼이나 경계해야 할 것은 위선자로 보일까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다. 그러니 우리, 완벽하게 착하지 못해도 괜찮다. 가끔은 앞뒤가 맞지 않아도 괜찮다. 위선자로 보일까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착한 척이라도 하며 살아보면 안 될까.

사회학 박사과정 김지민

[참고]

1. Jillian Jordan, Roseanna Sommers, David Rand, 「위선의 진짜 문제」 [원제: “The Real Problem With Hypocrisy”], 『뉴욕타임스』, 2017. 1. 13. 

2. 이문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트럼프 2.0 이후의 국제질서를 두고 한 표현. 

관련 인터뷰는 SBS 뉴스, 〈지식의 발견〉 이문영 교수 편 참고: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8503010 

3.권성민, 『커뮤니티에 입장하셨습니다』, 돌고래, 2025, 3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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