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여름이 본격적으로 오기도 전에 더위를 부르는 말이 먼저 달라졌다.
한국에서는 기존의 폭염주의보와 폭염경보에 더해 ‘폭염중대경보’와 ‘열대야주의보’가 새롭게 마련되었고, 일본에서는 35도 이상을 의미하는 극심한 더위의 날을 뜻하는 ‘맹서일(猛暑日 , 모쇼비)’을 넘어 최고기온 40도 이상인 혹독한 폭염의 날을 가리키는 ‘혹서일(酷暑日, 코쿠쇼비)’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말이 달라진다는 것은 현실이 달라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제 폭염은 단순히 “덥다”라는 감각을 넘어 시민이 하루를 이동하고 기다리고 머무는 일상의 장면들을 다시 보게 하는 문제가 되었다.
폭염 대응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무더위 쉼터 운영이나 냉방비 지원처럼 실내에서 더위를 피할 수 있도록 돕는 정책을 떠올린다. 물론 이러한 지원들도 중요하다. 그러나 시민의 하루는 실내에만 머물지 않는다. 집에서 지하철역으로, 학교에서 버스정류장으로, 사무실에서 횡단보도로 이동하는 사이에도 더위는 몸에 닿는다. 이처럼 폭염은 실내에서만 관리되는 문제가 아니라 시민이 걷고 기다리고 머무는 길 위에서 계속 마주하는 위험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그늘’은 단순한 편의시설을 넘어, 시민이 길 위에서 더위를 견디고 이동을 이어갈 수 있게 하는 생활 인프라가 된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몇 분,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는 몇 분, 뜨거운 보행로를 지나가는 짧은 시간, 이 작은 시간들을 정책의 대상으로 삼을 때, 폭염 적응은 시민의 일상 속에서 비로소 작동하기 시작한다.
☂️ 한국의 그늘막, 일본의 횡단보도에 서다: 제1차 한일 기후적응 포럼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연세대학교 기후적응 리빙랩 연구사업단(연구책임자 이태동 교수)은 기후에너지환경부 R&D 과제의 일환으로, 올해 일본에서 한국의 횡단보도 그늘막 실증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이미 익숙한 폭염 대응 시설이지만, 아시아에서도 한국과 중국 등 일부 국가에서만 확인되는 비교적 드문 도시 적응 인프라다. 실제로 JTBC가 2026년 5월 28일 보도한 기사에서는, 서울 중구의 횡단보도 그늘막 사진을 본 일본인 관광객이 “한국에 있을 때 도움이 됐다”라며 “일본도 이런 데 세금을 써야 한다”라는 취지의 반응을 보인 사례가 소개되었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도심 속 시설이 관광객의 시선에서는 폭염 속 보행자를 배려하는 공공 인프라로 읽힌 것이다.

▲ 제1차 한일 기후적응 포럼에서 이태동 교수가 일본 횡단보도 그늘막 실증의 필요성과 추진 배경을 설명하였다. (포스터 출처: 기획자의 집)
이처럼 한국의 횡단보도 그늘막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은 꾸준히 확인되어 왔다. 다만 그 관심이 실제 실증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일본의 도시 조건과 보행 환경 속에서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조정되어야 하는지를 함께 살펴야 한다. 그늘막은 단순히 시설 하나를 옮겨 설치한다고 작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로 구조와 보행 환경, 행정 규제는 물론 시민들이 실제로 어디에서 더위를 느끼고, 어떻게 길 위의 공공공간을 이용하는지까지 함께 검토되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현장 기반의 공동 탐색 방식인 리빙랩 접근이 필요하다. 리빙랩(Living Lab)은 실제 생활공간에서 시민, 행정, 전문가, 연구자가 함께 문제를 정의하고 해법을 시험하며 수정해가는 방식이다. 그늘막 실증 역시 일본의 도시 조건 속에서 어떤 그늘이 필요하고, 어떤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함께 확인해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자연스럽게 일본의 도시 조건을 이해하고, 실증의 방향을 함께 논의하는 자리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2023년 연구사업단과 업무협약(MOU)을 맺은 사회적가치연구원(CSES)이 기획자의집과 한국리노베링을 소개했고, 이 연결은 일본의 공공R부동산과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공공R부동산은 일본에서 유휴공간과 공공공간을 새롭게 읽고, 이를 지역과 사람의 활동으로 연결해온 도시 기획 플랫폼이다. 마침 공공R부동산은 서울의 폭염 대응 사례를 살펴보기 위해 서울 방문을 앞두고 있었다. 연구사업단이 기후적응 실증연구의 관점에서 일본의 폭염 대응 조건을 살피고 있었다면, 공공R부동산은 공공디자인과 공공공간 활용의 시선에서 한일 폭염 대응을 함께 비교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논의 상대였다. 이렇게 마련된 자리가 2026년 4월 24일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2026 제1차 한일 기후적응 포럼」이었다. 이날 포럼은 이승민 한국리노베링 대표의 진행으로 기후변화센터, 수원시정연구원, 서울시립대학교, 서울대학교 등 여러 기관의 연구자와 관계자들이 참여했다.
포럼은 한국의 횡단보도 그늘막 경험에서 출발해, 그것이 어떻게 일상의 편의시설을 넘어 폭염 대응과 기후적응의 인프라로 자리 잡아왔는지를 공유하는 자리로 시작되었다. 한국의 횡단보도 그늘막은 폭염 대응의 범위가 길 위의 일상으로 확장되어온 과정을 보여준다. 폭염은 더 이상 개인이 알아서 피해야 할 불편으로만 다루어지지 않는다. 2015년 서울 서초구에서 시작된 횡단보도 그늘막은 전국의 지자체로 빠르게 확산되었으며, 최근에는 온도와 바람을 감지해 자동으로 작동하는 스마트 그늘막으로 진화했다. 이와 함께 행정안전부의 설치·관리 기준과 지자체 조례가 마련되면서 보행 안전, 운전자 시야 확보, 태풍 대응 등 유지관리 책임 역시 제도적 안정성을 갖추게 되었다. 이 변화는 길 위의 짧은 기다림도 폭염 대응의 일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도시가 시민의 이동 중간에 생기는 더위의 위험을 포착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늘막은 작지만 중요한 정책적 전환이다.
☂️ 일본에는 왜 없는가: 한 도시의 해답이 다른 도시의 질문이 될 때
더위는 참아야 할 일상일까, 함께 대응해야 할 재난일까.
일본 도시에서 폭염 대응을 위해 필요한 것은 냉방일까 아니면 길 위의 그늘일까.
낯선 사람들과 그늘 아래 잠깐 머무는 일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포럼에서 일본에서의 횡단보도 그늘막 실증 계획을 설명한 뒤, 공공R부동산 관계자들에게 현지 적용 가능성과 검토해야 할 조건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한국의 그늘막을 그대로 옮길 수 있는지를 묻는 데서 출발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의 도로 환경, 행정 기준, 시민들의 사용 경험 속에서 어떤 그늘이 가능한지를 함께 살펴보자는 문제의식에 가까웠다. 이들과의 논의는 이 질문들이 단순히 “왜 설치하지 않는가”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첫 번째로 확인된 것은 폭염을 받아들이고 대응하는 방식의 차이였다. 일본은 열중증(熱中症, 온열질환) 위험 경보와, 기온뿐 아니라 습도와 복사열까지 반영한 WBGT(Wet Bulb Globe temperature) 기반 더위 지수로 더위의 위험을 알리고, ‘Tokyo Cool Spot Map’과 ‘아루쿠(ALKOO)’를 통해 시원한 장소와 그늘진 길을 안내한다. 또한, 쿨링쉘터, 에어컨 사용 권고, 학교 냉방 설비 확충은 더위를 피해 실내에 머물도록 돕는 대책이며, 도시 녹화와 히트아일랜드 완화 정책은 도시 전체의 열환경을 장기적으로 낮추려는 시도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은 대체로 시민이 더위를 피할 장소를 찾고, 스스로 위험을 관리하도록 돕는 방식에 가깝다. 반면 한국의 횡단보도 그늘막은 시민이 기다리는 자리 자체에 그늘을 만드는 장치다. 결국 일본의 대응은 ‘찾아가는 그늘’에 가깝고, 한국의 횡단보도 그늘막은 ‘만들어주는 그늘’에 가까웠다.
둘째, 이러한 차이는 '폭염을 자연재난으로 바라보는가'의 문제와 연결된다. 최근 5년간 온열질환 사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해를 비교하면, 한국은 2023년 32명이었던 반면, 일본은 2020년 1,528명으로 50배 가까이 많았다(세계일보, 2024.6.24). 이 숫자의 차이는 단순한 피해 규모의 차이가 아니라, 폭염을 자연재난으로 바라보는가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한국에서는 폭염이 자연재난으로 다뤄지면서 대응 역시 공공의 과제로 확장되어 왔다. 반면 일본에서는 폭염이 재난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폭염 대응은 개인이 참고 견뎌야 할 문제로 남아 있기 쉽다. 바로 이 지점에서 횡단보도 앞 그늘막은 의미를 갖는다. 그늘막은 개인의 인내에 맡겨져 있던 폭염의 문제를, 공공이 함께 대응해야 할 문제로 바꾸어 놓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종합하면, 일본에서의 그늘막 실증은 하나의 시설을 설치하는 일을 넘어선다. 그것은 한국에서 익숙한 횡단보도 그늘막이 일본의 도시 조건 속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어떤 방식으로 변형되어야 하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한 도시의 해답이 다른 도시에서는 곧바로 해답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의 횡단보도 그늘막 실증은 새로운 폭염 적응의 질문을 여는 작은 실험이 될 수 있다.

▲ 제1차 한일 기후적응 포럼에서 한일 폭염 대응 방식의 차이와 일본 도시공간에서 횡단보도 그늘막 설치 시 검토해야 할 제도적·공간적 조건을 논의하였다.
☂️ 일본에도 횡단보도 앞 그늘막이 생긴다면? (What if Japan had crosswalk shade canopies, too?)
그늘막이 일본의 도시공간 안에 놓인다면 어떤 방식이어야 할까, 우리는 그 답을 현장에서 찾고자 제1차 한일 기후적응 포럼이 열리고 한 달 뒤 5월 25일부터 5박 6일간 일본 현지조사에 나섰다. 우리는 산업기술총합연구소(National Institute of Advanced Industrial Science and Technology, AIST), 시부야 그린 시프트 프로젝트(SHIBUYA GREEN SHIFT PROJECT), 공공R부동산 등과 총 네 차례의 세미나를 진행했다.
이 중 현지조사 넷째 날 만난 시부야 그린 시프트 프로젝트는 기존 일본 정부의 실내 중심 폭염 대응과 달리, 야외 폭염 대응에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다이킨공업주식회사 도쿄지사 소속 마츠모토 겐지(松本賢治) 과장은 실내 대피가 당장의 폭염 피해를 줄이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외부 활동의 감소는 장기적으로 사회적 연결의 약화, 고립감과 같은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이 프로젝트는 이러한 한계를 넘어 녹지와 그늘, 기후적응 기술을 통해 도시의 온도를 낮추고, 폭염 속에서도 시민들이 야외에서 걷고 머물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횡단보도 그늘막 실증이 일본의 도시공간 속에서도 시민의 이동과 머무름을 지지하는 작은 실험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다.

▲ 일본 횡단보도 그늘막 실증을 주제로, 츠쿠바, 카시와, 도쿄에서 현지 적용 가능성을 논의하는 네 차례의 세미나를 진행했다.
세미나와 함께 중요한 일정은 횡단보도 현장조사였다. 우리는 츠쿠바와 카시와, 도쿄의 횡단보도를 오가며 신호 대기시간, 보행자의 대기 위치, 그늘을 찾는 방식, 주변 차양과 나무그늘의 활용, 그리고 보행자·자전거·유모차 등의 이동 흐름을 관찰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체감한 것은 그늘의 절실함이었다. 한국에서는 익숙한 횡단보도 그늘막이 일본의 횡단보도 앞에서는 보이지 않았고, 5월인데도 한여름처럼 내리쬐는 햇볕은 신호를 기다리는 짧은 순간에도 따갑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건물이나 나무가 만든 그늘을 찾아 움직였고, 그 결과 횡단보도 가까이 서기보다 그늘이 닿는 곳에 조금 떨어져 서 있는 모습도 종종 목격할 수 있었다. 츠쿠바역 주변에서는 지름길로 곧장 가기보다 버스 승강장 위에 설치된 차양 아래 그늘을 따라 돌아 걷는 모습도 포착되었다.
이처럼 사람들의 움직임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늘막이 놓일 수 있는 물리적 위치와 조건도 함께 살폈다. 실제 설치를 위해서는 보행자의 이동을 방해하지 않는지, 횡단보도 앞 대기 공간 안에 안전하게 놓일 수 있는지를 검토해야 했다. 특히 그늘막은 횡단보도에서 일정 거리 이상 떨어져 설치되어야 하는데, 이때 시설물의 범위는 지면에 닿는 지지대만이 아니라 공중으로 뻗은 차양막의 끝부분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자전거 통행의 경우 현장에서 큰 변수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일본에서는 자전거가 원칙적으로 차도를 통행하고 보도 통행은 예외적 조건이 있을 때만 허용되기 때문이다. 덕분에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좁은 일본의 보도 환경 속에서도 자전거 동선과의 간섭 부담을 덜고, 대기 공간 내 그늘막의 물리적 입지를 확보하는 데 좀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결국 일본에서 그늘막을 검토한다는 것은 단순히 비어 있는 공간을 찾는 일이 아니었다. 보행자의 동선과 제도적 안전 기준, 그리고 실제로 그늘이 필요한 지점을 다각도로 함께 읽어내는 작업이었다.

▲ 츠쿠바 오시미즈 공원(大清水公園) 앞과 카시와노하의 라그비 스쿨 재팬(Rugby School Japan) 인근 횡단보도
현장조사에서 신호 대기 공간의 그늘 부재를 확인하고, 일본에서의 그늘막 실증 후보지를 검토하였다.
☂️ 공공R부동산, 그늘은 설치되는 것이 아니라 ‘사용’된다
일본 현지조사 다섯째 날, 우리는 도쿄에서 공공R부동산 관계자들을 다시 만났다. 이 자리에서 지난 4월 서울 방문 당시 이들이 직접 살펴본 폭염 대응 사례와 관찰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이들이 주목한 것은 서울과 도쿄의 폭염 대응 시설 차이였지만, 더 흥미로운 지점은 시설 자체가 아니라 시민들이 그늘을 어떻게 찾아가고 사용하는가였다.

▲ 공공R부동산과의 세미나에서 서울 현장방문 내용, 일본 현지조사 결과, 향후 그늘막 실증 추진 방향을 논의하였다.
첫째, 서울에는 다양한 그늘의 형태가 있었다. 횡단보도 앞 그늘막과 스마트 그늘막처럼 신호를 기다리는 보행자를 위한 그늘, 운동기구 위에 설치된 차양처럼 야외활동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 그늘,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냉방 공간에 머물 수 있는 스마트쉼터처럼 공공이 조성한 그늘이 있었다. 또한 카페 앞 파라솔처럼 가게가 길 위로 내어놓은 작은 그늘도 있었다. 서울숲 나무 아래나 한강 다리 아래처럼 이미 그늘이 있는 장소가 사람들이 머물며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뀐 사례도 있었다. 특히 그늘진 자리에 널찍한 평상이 놓이고, 사람들이 그 위에 앉거나 몸을 눕혀 쉬는 장면은 일본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도시의 사용 방식이었다. 이처럼 서울의 그늘은 하나의 시설이 아니라, 공공이 조성한 야외 그늘, 냉방 기능을 갖춘 대기 공간, 가게 앞의 작은 그늘, 기존의 그늘을 머무는 장소로 바꾼 공간들이 맞물리며 도시 곳곳에서 다양한 층위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둘째, 그늘의 종류에 따라 이용 방식도 달랐다. 디자인된 인공 그늘, 옅은 그늘, 짙은 그늘, 나무그늘은 시민들에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선택되었다. 잔디가 깔려 있지 않아 먼지가 이는 곳이라도 충분히 시원하고 넓은 그늘이 있으면 사람들은 기꺼이 그곳에 자리를 펴고 머물렀다. 그늘의 크기와 형태에 따라 혼자 머무는 자리, 두 사람이 앉는 자리, 여러 명이 함께 모이는 자리도 달라졌다. 결국 그늘은 단순히 햇빛을 피하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떻게 머물고 관계 맺는지를 바꾸는 도시의 조건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셋째, 서울의 야간 이용 문화도 중요한 차이로 언급되었다. 낮의 열기를 피해 저녁과 밤 시간대에 한강이나 청계천 같은 수변공간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모습은 일본과는 다른 도시 경험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수변공간이 단순한 경관이나 산책 공간을 넘어 시민들이 머물고 문화를 경험하는 장소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폭염 적응은 낮 시간의 그늘을 만드는 일에만 머물지 않는다. 시민들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더위를 피하며 도시를 사용하는지를 함께 살펴야 한다.
공공R부동산의 관점을 통해 서울의 폭염 적응 인프라는 단순히 어떤 시설이 어디에 설치되어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들이 더위를 피하고 머무르며 도시를 사용하는 방식의 문제로 다시 읽혔다. 그늘은 설치되는 순간 완성되는 시설이 아니라, 시민들이 선택하고 머물고 다시 찾을 때 비로소 도시의 적응 인프라가 된다. 우리가 횡단보도 그늘막을 리빙랩 방법론으로 접근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직 일본에서 그늘막이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 사용을 설치 이후의 반응으로만 확인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설치 이전부터 그늘막이 어디에 놓일 수 있는지, 어떤 형태여야 하는지, 시민들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용할 수 있을지를 함께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결국 우리가 일본에서 진행하려는 리빙랩은 설치 이후의 반응을 기다리는 방식이 아니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그늘의 사용 장면을 상상하고, 그것이 일본의 보행 환경과 도시문화 속에서 어떻게 자리 잡을 수 있을지 함께 검토하고 조정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다.

☂️ 길 위의 실험실(Street Living Lab): 어떻게 그늘을 만들어갈 것인가
그늘은 작다. 그러나 그늘이 던지는 질문은 작지 않다. 시민이 걷고, 기다리고, 머무는 길 위의 더위를 줄이려면, 그늘을 단순한 시설로만 볼 수 없다. “일본에도 한국식 횡단보도 그늘막을 설치할 수 있는가”라는 처음의 물음은 현지조사를 통해 더 중요한 질문을 만났다. 일본의 거리에서는 어떤 그늘이 가능할까. 시민들은 어떤 그늘을 실제로 사용할까. 그리고 그 그늘은 누가 만들고, 어떻게 유지관리할 수 있을까. 서울에서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그늘막도 도쿄의 거리에서는 전혀 다른 조건을 마주한다. 보도 폭이나 도로 위 시설물 설치 기준, 경찰과 행정의 권한, 지진과 태풍을 고려한 안전성, 설치와 유지관리의 주체, 시민들이 임시 구조물을 받아들이는 감각까지 함께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늘은 하나의 설계도나 한 번의 설치로 완성되지 않는다. 거리의 물리적 조건을 살피고, 시민의 사용을 듣고, 가능한 방식을 실험하며 다시 조정하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다.
이러한 점에서 리빙랩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리빙랩은 한 도시의 해답을 다른 도시로 옮겨놓는 과정이 아니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그늘의 사용을 설치 이전부터 함께 상상하고 논의하며, 시민이 걷고 멈추고 기다리는 자리에서 가능한 해법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횡단보도 앞은 하나의 길 위의 실험실, Street Living Lab이 된다. 기후적응은 거대한 선언이 아니라, 어쩌면 횡단보도 앞에서 시민이 신호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을 살피는 일에서 시작된다. 그 시간 동안 시민이 어디에 서는지, 어떤 그늘을 찾는지, 무엇을 불편해하는지 관찰하고, 도시의 조건 속에서 가능한 해법을 함께 실험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리빙랩의 공동창조(Co-creation, 共創) 방식으로 도시의 그늘을 만들어가려는 이유다.
이제 일본의 지자체들도 폭염 대응을 리빙랩 방식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시나가와구(品川区) 도시계획과가 추진하는 ‘여름을 시원하게 만드는 폭염대책 솔루션의 공동창조’ 공모는 그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현재 연구사업단은 공공R부동산과 함께 횡단보도 그늘막 첫 실증 제안서를 준비하고 있다. 이는 시나가와의 거리에 잠시라도 숨을 고를 수 있는 그늘을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자 도시의 그늘을 함께 만들어가는 방식에 대한 또 하나의 실험이 될 것이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 연세대학교 기후적응 리빙랩 연구사업단 연구책임자 이태동
연세대학교 기후적응 리빙랩 연구사업단 연구원 김지연
